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등. 후세를 거듭해도 기록될 만한 전투 이전에 한 사람으로써의 과거사는 분명 존재합니다. 본 글에서 자세히 알아보겠으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순신 장군의 출생
  • 이순신 장군의 우직한 성품
  • - 서익의 친구 재직 추천거부
  • - 첩을 건내준다는 호의에 거부
  • - 상사의 오동나무 베기거절
  • 곧은 성품에 대한 주변반응
  • - 포구의 이탈자 보고
  • - 이용의 최하근무성적 보고
  • 녹둔도 전투
  • - 녹둔도 전투를 예상한 이순신

 

 

□ 이순신 장군의 출생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 장군은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였습니다. 출신은 한성이며 문반가문의 출신으로 1543년 3월에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21세였던 1565년! 방진의 딸인 수진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장인인 방진은 보성군수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도 겪고 싶지 않은 낙방이라는 것이, 이순신 장군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이미지

 

⊙ 시험에서의 낙방

1572년 28세였던 이순신 장군은 훈련원 별과에 응시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험을 보던 중에 말에서 낙마를 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기절을 하게되고 깨어나 보니 시험은 끝나 있었으며, 다리가 부러져 부목을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4년 뒤 1576년 32세 나이에 무과에 급제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무과 합격자들을 기준으로 이순신 장군의 급제는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처음 관직은 권지훈련원봉사! 지금으로 치면 훈련원의 실습생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정식적인 직책은 아니였습니다.

 

 

⊙ 이순신 장군의 우직한 성품

▶ 서익의 친구 재직 추천거부

그 해 12월, 이순신 장군은 9품인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을 역임하게 됩니다. 1579년부터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를 하게 되는데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의 우직한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훈련원 봉사로 근무를 하던 시절 병조정랑 서익의 요청을 받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단호히 거절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 해협전투 이미지

 

▶ 첩을 건내준다는 호의에 거부

지금이야 첩은 있을 수 없는 호칭이지만, 그 당시에는 어쩌면 귀족과 양반의 신분아래 당연히 거느리고 있어야 하는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1579년 병조판서 김귀영은 자신의 서녀를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려 하였으나, 이순신은 어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냐며 그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을 하였다고 합니다.

 

 

▶ 상사의 오동나무 베기거절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이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는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는데 '전라좌수영'은 군관들에게 오동나무를 베어올 것을 명했습니다.

 

오동나무를 베고자 했던 목적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는 강한 의지로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순신 장군 거북선 이미지

 

⊙ 곧은 성품에 대한 주변반응

▶ 포구의 이탈자 보고

당시 전라좌수영인 성박은 후임자인 이용에게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인수인계하듯 남겼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이용은 이순신 장군을 밉게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용은 좌수영 관하에 있는 다섯 포구!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의 점검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탈자에 대해 확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포구만 보고를 하고, 나머지 이탈자가 있던 4개의 포구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이 직접 나머지 포구를 조사하여 장계를 올렸으나 이용은 이를 파기하고 마무리 하였습니다.

 

 

▶ 이용의 최하근무성적 보고

이용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독 이순신 장군의 근무성적만을 최하로 매겼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전라도도사였던 조헌은 고과내용을 검토하고 부당한 처사임을 직감하여 항의하였고 수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제의 악연이 오늘의 악연이란 법은 없는가 봅니다. 이용은 나중에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1583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은 1583년 남병사의 군관을 역임하였습니다.

 

그 후 함경도로 옮기게 되는데 이 곳은 당시 북방 국경지대 였습니다. 그렇기에 이순신은 여진족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조산만호 이자 둔전사의가 되는데 이는 '녹둔도 전투' 이전 해에 일어났던 인사처분 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 드라마 이미지

 

□ 녹둔도 전투

1587년! 당시 가을에는 풍년이었습니다. 이에 맞춰 이순신은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녹둔도로 향했는데, 당시 녹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숨겨놨던 화살과 병기류로 기습공격을 하게 됩니다.

 

이를 기점으로 녹둔도 전투가 시작됩니다. 당시 이순신의 무예가 뛰어났다는 것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녹둔도 전투로 인해 조선군 160명이 끌려갔고 11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열 다섯필의 말이 약탈당하는 상황에서도 이순신과 이경록은 끝까지 남아서 싸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고작 수십명의 병사를 데리고 1000기의 여진족 기병과 싸워 방어를 하였습니다.

 

 

⊙ 녹둔도 전투를 예상한 이순신

당시 이순신은 녹둔도 전투를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번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의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이일은 모두 거절을 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이순신 장군에게는 주변 인물이 곧 걸림돌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녹둔도 전투의 피해를 책임져야 할 이일은 모든 문책을 이순신 장군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심지어 녹둔도 전투를 두고 이일은 녹둔도 함몰이라고 비판까지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결국 문책받았고 그해 10월 투옥이 됩니다.

 

투옥이 되었음에도 이경록과 이순식을 군율에 따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조정을 건의했으나, 조정에서는 사형은 과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처벌은 면치 못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일은 최종적으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이순신은 여진족 장수를 꾀어냈던 2차 녹둔도 정벌의 공을 세워 사면을 받고 복직을 하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 녹둔도 전투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출생부터 녹둔도 전투까지 알아 보았습니다. 녹둔도 전투 이후에 세운 그의 업적은 훗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큰 업적 뒤에는 힘든 고초가 따른 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바른 길로만 가고자 했던 성품에 다시 한번 존경의 뜻을 표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순신 장군 썸네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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